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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서울의 궁궐

Pryous_jiny 2016. 7. 31. 21:18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 시대의 궁궐은 모두 다섯 곳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이다.

 

 

궁궐의 건물

궁궐에는 왕과 왕비뿐만 아니라 왕실의 가족과 관리, 군인, 내시, 나인 등 많은 사람이 살았다. 이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신분에 알맞은 건물에서 생활하였고, 건물의 명칭 또한 주인의 신분에 따라 달랐다. 예컨대, 궁궐에는 강녕전이나 교태전과 같이 자가 붙는 건물이 있는데, 이러한 건물에는 궁궐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왕과 왕비만 살 수 있었다. 왕실의 가족이나 후궁들은 주로 보다 한 단계 격이 낮은 자가 붙는 건물을 사용하였다. 그 밖의 궁궐 사람들은 주로 ’, ‘’, ‘이 붙는 건물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왕도 이 아닌 다른 건물을 사용하였다.

 

 

경복궁

큰 복을 누리며 번성하라.’라는 뜻을 가진 경복궁은 조선 시대 최초의 궁궐이면서 여러 궁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경복궁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뒤에 한양, 즉 지금의 서울에 세운 조선의 법궁이다.

경복궁은 7600여 칸의 건물을 지닌 어마어마한 궁궐이다. 이러한 경복궁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은 부지런히 나라를 다스리라.’라는 뜻을 가진 근정전이다. 근정전은 왕의 즉위식, 왕실의 혼례식, 외국 사신과의 만남 등과 같은 나라의 중요한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경복궁에서 안쪽에 자리 잡은 교태전은 왕비가 생활하던 곳이다. 교태전은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왼쪽과 오른쪽에 온돌방을 놓은 구조로 되어 있다. 교태전 뒤쪽으로는 아미산이라는 작고 아름다운 후원이 있다.

경사스러운 연희라는 뜻을 가진 경희루는 커다란 연못 중앙에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누각이다. 이곳은 왕이 외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던 장소이다.



 창덕궁

창덕궁은 경복궁 동쪽에 있다고 하여, 창경궁과 함께 동궐로도 불렸다. 건물과 후원이 잘 어우러진 창덕궁은, 유네스코에 세계 유산으로 기록된 아름다운 궁궐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답게 산자락에 자연스럽게 배치된 건물이 인상적이다. 넓은 후원의 정자와 연못들은 우리나라 전통 정원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부용지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전통적 사상을 반영하여, 땅을 나타내는 네모난 연못 가운데 하늘을 뜻하는 둥근 섬을 띄워 놓은 형태이다. 연못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부용정은 십자 모양의 정자로, 화려한 단청과 처마 끝의 곡선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창경궁

창경궁은 성종이 할머니들을 모시려고 지은 궁궐로, 효자로 유명한 정조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여 효와 인연이 깊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 때 제 모습을 찾았으나, 그 뒤로도 큰 화재를 겪는 수난을 당하였다. 문정전 앞뜰은 사도 세자가 목숨을 잃은 비극이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왕비가 생활하던 통명전 서쪽에는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뒤쪽에는 열천이라는 우물이 남아 있다.

한편,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사람들이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면서 많은 건물을 헐고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꾸었다. 1983년에 동물원과 식물원 일부를 옮기고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경희궁

경희궁의 처음 명칭은 경덕궁이었으나, 영조 때 경희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왕들이 머물렀다. 특히, 영조는 25년 동안이나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경희궁은 경복궁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로도 불렸다. 궁궐의 원래 규모는 1500칸에 이르렀으나,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헐려 터만 남아있다 최근에 옛 모습을 일부 되찾았다.

이 궁궐 안에는 왕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논의하거나 사신을 접대하는 등의 행사를 치르던 숭정전과 영조의 어진을 모신 태령전이 있다.

 

 

경운궁

지금은 덕수궁으로 불리는 경운궁,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 대군의 집이었다. 선조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서울로 돌아오니 궁궐이 모두 불타 버려서 이곳을 넓혀 행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에 이 행궁을 경운궁이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조선 왕조 말기에 고종이 강한 나라들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거처를 경운궁으로 옮긴 뒤, 비로소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운궁 안에는 중화전과 같은 전통적 건물, 석조전이나 정관헌과 같은 서양식 건물이 함께 들어서 있다. 중화전은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고, 석조전은 왕이 일상생활을 하던 곳이다. 정관헌은 고종 황제가 커피를 마시며 여가를 즐기거나 손님을 맞이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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